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독립문 이완용 글씨, 고양시 이항구의 묘소]
?
?
죽어서도 일제에 충성을 다한 매국노 이완용
?
?
『이완용의 장례는 정말 거창하고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유아사 쿠라헤이(湯?倉平)가 장의위원장을 맡고 부위원장은 후작 박영효와 총독부 내무국장 두 명이 맡았으며 장의위원은 일본인과 조선인 명사를 망라한 50여명에 달했다. 일본 천황이 조선총독부 법무국장을 칙사로 삼아 애도의 뜻을 담은 글과 장례 용품을 보내온 것을 비롯해 일본 황태자와 황족 전부, 일본 내각 수상 이하 대신 전부, 귀족원과 중의원 의장, 일본내의 고위 귀족들이 모두 장례용품과 조위금 및 조화를 보내왔다.
?
2월 18일 영결식 당일의 장례 행령은 더욱 화려했다. 이날 오후 4시 이완용의 시신은 일본식 마차에 실려 옥인동 집을 나서 영결식장인 용산으로 향했다.
?
장례 행렬의 맨 앞에는 기마 순사가 서고 그 뒤로 의장병이 위엄을 더한 가운데 조선 구식의 소교의 한 쌍과 곡비 한 쌍이 곡을 하며 따랐다. 붉은 비단에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의장정2위대훈위후작이공지구’라고 쓰인 명정이 바람에 날리고 그의 혼을 담은 혼여가 이어졌다. ‘명정에 쓸 직함이 많아야 양반’이라던 시절에 이완용의 유족들은 대한제국 총리대신을 비롯해 그 수 많은 직함을 다 물리치고 일본 천황이 준 벼슬만 명정에 쓴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이완용은 죽어서도 일제에 충성했다’라고 평했다. 명정 다음에 일본 천황과 황족, 순종을 비롯한 이왕가의 왕족들이 보낸 조화의 행렬이 이어지고 대한제국 황실이 수여한 훈1등 이화대수장과 대훈 금척대수장, 일본 천황이 준 욱일동화장과 대훈위 국화대수장 등 그의 생전의 ‘공훈’을 말해주는 갖가지 훈장들이 친척들의 손에 들려 줄을 지었다.
?
이어 기마 순사들의 호위 아래 이완용의 시신을 실은 마차가 천천히 따르고 상주 이병길과 이항구를 비롯한 유족들이 마차의 뒤를 따랐다.』
?
이완용평전[윤덕한/중심] 353쪽
?
?
조선과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당 이완용(李完用, 1858. 6. 7~1926. 2.12)은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이며, 부친은 이호석이며 친척인 이조판서 이호준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882년 증광문과 별시에 병과로 급제 후 규장각 대교, 사헌부 장령, 주차미국참찬관, 이조참의, 외무협판, 학부대신,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하고, 일제의 백작/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지냈으며, 사회 활동으로는 독립협회 위원장/회장을 역임함
??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시 낙생면 백현리에서 가난한 선비 이호석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먼 친척인 이호준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당시 예방승지인 이호준은 덕망 있는 선생을 초빙하여 한학과 서예를 익히게 한다. 이때 그의 서예 솜씨가 익히게 된 것이다. 양부인 이호준은 대원군과 사돈관계로 나중에는 이조판서로 지낼 만큼 처세술이 좋았다.?
?
구식 군인의 항쟁으로 척족들을 처단하고 명성황후는 궁궐을 탈출하여 장호원으로 피신가서 청국에 구원요청하자 청군의 개입으로 대원군이 실각하고 천진으로 압송 당하는 임오군란이 발생한다. 다시 청의 개입으로 실권을 되 찾은 조정은 증광별시를 치르게 된다. 그의 행운은 이렇게 일찍 다가왔다. 명성황후의 무사귀환에 따른 증광별시의 병과에 급제하게 된다. 당시 양부 이호준은 이조판서로 재직 중이었다. 이때부터 이완용의 관운은 총리대신까지 순탄하게 이어진다.
?
당시 척족세도가인 여흥 민씨의 탐혹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어 희망이 없었다.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청의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하면서 이 땅에 외국군대가 지금까지도 주둔하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원 확보와 생산 판매를 위하여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조선반도 지배를 위하여 각축을 벌인다. 조정에서는 청과 일제의 야욕에 맞서기 위해 영토확장의 야욕이 비교적 덜하다고 생각하는 미국을 본 받아야 할 대상국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
조정에서 시대의 조류에 의한 신학문을 도입하기 위해 육영공원을 세워 그곳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가리키게 된다. 이완용은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움직이며 흐름을 읽을 줄 알아 육영공원에서 배운 기초영어로 주미한국대사관의 박정양 전권공사 다음의 2위 서열인 참찬관으로 미국으로 부임하게 되고 친미파의 창시자가 된다.
?
생모의 사망으로 공직을 떠나 고향으로 낙향하는 사이 동학전쟁,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이 일어나고 조선의 정치사는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외세인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해 조정을 새롭게 조각한다. 조선은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 투쟁으로 극과 극을 이루면서 외세인 청국, 일제, 러시아를 끌어 드리게 된다. 백성들의 고통은 외면하면서 자신의 권력은 끝까지 가지고 가겠다는 고집으로 조선은 병들어가고 있었다.
?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창설에도 주요한 활동을 하였다. 정동파의 멤버로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협회의 운영비 전체 모금액이 510원인데 이완용이 100원을 냈다. 거기서 위원장직을 맡았으며 찬조연설도 하였으며 나중에는 회장이 되었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당시만 하여도 조선의 개혁에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고 독립문의 현판도 이완용의 글씨라 한다.
?
을사보호 조약이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되고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국가가 11개국이었으며 공사를 파견한 나라는 청국, 일본,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7개국 이었다. 그 중 미국은 일제와 밀약을 맺어 조선을 일본에게 양도하였던 것이다. 사전에 약속 한 대로 미국정부는 서울주재 공사관을 조약 체결후 일주일이 지난11월 24일에 제일 먼저 철수한다. 고종은 가장 믿을 만한 국가가 미국이고 식민지 지배 야욕이 없는 국가로 믿었것만 제국주의 국가의 본질을 몰랐던 것이다. 가쓰라-테프트 각서에 따른 필리핀과 조선의 식민지 지배의 진실된 내용을 전혀 모르고 바라 보고만 있어야 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미국 정부에게 조선의 안녕을 희망했지만 배신에 속고 말아야 했다. 미국은 지금도 냉정하게 다시 바라보아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주변 강대국의 외세에 맹목적 추종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결과가 초래 된 다는 것을 역사를 통하여 충분히 검증하였던 것이다.
?
그는 친미파에서 아관파천으로 친러파가 되었다가 다시 친일파로 등장하게 된다. 을사조약을 체결시 학부대신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로 들어서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의 적극적인 지지로 총리 대신이 되고 일제의 꼭두각시가 되어 고종에게 협박을 강요해 퇴위하고 순종을 등극하게 한다. 그리고 총리대신으로 한일강제합방을 추진하고 조선의 간판을 내리게 하였다. 일제는 합방의 대가로 그에게 백작이라는 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하사하였으며 당시 그의 재산은 민영휘 다음으로 많은 재산가가 되었다고 한다.
?
그러나 그에게도 의혈 청년 이재명의 칼날에 비명 횡사 할 뻔하였다. 1909년 종현교회에서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하고 인력거를 탈 때 크게 부상을 입는다. 이로 인하여 폐에 상처를 입어 고생하다 죽음을 당하게 된다.
?
?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당시의 기록
「순종 3권, 2년(1909 기유 / 대한 융희(隆熙) 3년) 12월 22일(양력) 2번째기사
이완용이 이재명으로부터 칼에 찔리다?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이 칼에 찔려 중상을 입어 대한 의원(大韓醫院)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날 이완용 총리대신(總理大臣)이 종현(鍾峴) 천주교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L?opold〕제2세 추도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길에 해를 입었다. 범인 이재명(李在明)은 평양(平壤) 사람으로 그 후 명치(明治) 43년 5월 18일 경성(京城) 지방 재판소에서 ‘모살미수(謀殺未遂) 및 고살인(故殺人)’ 율문(律文)을 적용하여 교수형으로 처결하고 9월 13일에 집행하였다.】」
?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도 그날의 사건내역이 상세히 쓰여 있다.
「이재명이 이완용을 칼로 찌르다.
23일[음력 10월 11일 정사]에 이재명이 이완용을 칼로 찔렀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이재명은 평양 사람으로, 이때 나이 21세였다. 육 년 전 미국에 유학 갔다가 돌아온 뒤로 언제나 국치를 생각하며 분을 풀지 못했다. 이때 합병론이 일어나자 탄식하며 말했다.
“이용구를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얼마 뒤에 다시 말했다.
“화의 근원은 이완용이다.”
이에 처음 계획을 바꾸었다. 이때 비리시 황제가 죽자 이완용이 종현교당에서 열리는 추도회에 참석했다. 이재명이 교당 밖에서 엿보고 있다가 이완용이 나와서 인력거를 탈 때 칼을 휘두르며 곧바로 인력거꾼 박원문을 찔러 쓰러뜨렸다. 이어 한달음에 뛰어올라 이완용이 빨리 피하는 사이에 그의 허리와 등 세 곳을 잇달아 찔렀다. 순사들이 이재명을 찔러 인력거에서 떨어뜨린 뒤 곧 이완용을 데리고 돌아갔다.」
?
그러나 그는 죽어서도 일제의 천황이 준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의장정2위대훈위후작 이공지구’의 관직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골수의 친일파이다. 한때는 사대부의 후손으로 조선의 조정에서 뛰어난 인재였으나 약삭 빠르고 기회주의로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변신에 변신을 하여 조국을 팔아 매국노가 된 것이다. 그의 친일은 당대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 이항구가 작위를 승계하여 대를 이어 일제에 충성을 다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한국땅에서 발붙이지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일부 후손은 친일재산을 찾고자 하였으나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였다.
?
조선의 왕족들과 사대부 척족들은 친청파,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외세의 힘을 빌어 자신들의 영달에만 관심이 있었지 나라가 망하는 그 순간에도 조국의 안위와 백성의 고달픔을 고뇌한적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 민족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은 백범 김구, 도마 안중근, 매헌 윤봉길 등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의 광복과 백성들의 자유를 위해 만주벌판에서 이역만리 타향에서 일제의 총칼에 맞서 왔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걸었던 길은 되돌아 보고 그들의 용기와 기상을 역사의 기록에 남기고 기려야 할 것이다.
?
100년 전이나 지금의 한반도 국제 정세는 변한 것이 없다 아직도 주변 외세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 먹으려고 하는 세력들이 존재한다. 이완용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부끄럽고 추한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끄러운 이름이 이완용이 한 명만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나 자신만이 느끼는 것일까?
또 다른 이완용의 등장을 우리는 크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