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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배경 |
오늘날 안동을 이야기 할 때 삼태사(三太師)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안동권씨, 안동김씨, 안동장씨 등 안동을 대표하는 3성씨의 시조를 일컫는다. 이들은 권행(權幸),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 세 사람으로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한판 승부를 벌인 병산전투에서 왕건을 후원하였던 대표적인 안동지역의 호족들이었다. 이에 삼태사는 고려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으로 봉해지고 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들의 활약을 높이 평가하여 안동은 고창군에서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1018년(현종 9)에 안동도호부가 되었는데, 이에 속했던 현은 모두 11개로 흥주(순흥), 의흥현(군위), 기천현(풍기), 은풍현(예천일부), 봉화현, 의성현, 강주(영주·순흥 일부), 보주(예천), 예안현, 의인현(예안 일부), 안덕현(청송) 등이었는데 당시 안동지역의 범위를 추정할 수 있다. 태사묘는 이렇게 발전한 안동의 토대를 일군 이들 삼태사들의 영혼을 기리고 안동 사람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다. |
건축 특징 |
태사묘는 안동시 북문동24-1에 소재하여 대지 1229평, 지상에 태사묘우(太師廟宇), 숭보당(崇報堂), 경모루(景慕樓), 동재(東齋), 서재(西齋), 주사(廚舍), 전사청(典祀廳), 안묘당(安廟堂), 보물각(寶物閣), 차전각(車戰閣)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고,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사묘우는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에 퇴칸이 없는 경건한 사당 건물이다. 숭보당은 팔작지붕기와집으로 정면 5칸에, 좌우측에 온돌방이 놓여 있고 가운데 3칸이 대청마루인 전형적인 강당식 건물이다. 경모루는 2층의 누문 형태인데 아래층은 삼문의 형식으로 이곳이 위패를 모신 신성공간임을 나타낸다. 2층 겹처마에 팔작지붕기와집이다. |
건축 구성 |
정문 경모루로 누각 건물로, 이곳을 들어서면 전면에 숭보당(강당)이 있고, 좌우로 동·서재가 있으며, 그 뒤쪽으로 태사묘(사당)가 독립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왼쪽의 별도 공간에 전사청과 보물각이 자리 잡고 있다. 보물각에는 보물 제451호로 지정된 삼태사(三太師)의 유물 12종 22점이 보관되어 있다. 숭보당 안에는 퇴계 이황(李滉)이 지은 중건기문 등이 게판 되어 있고, 묘정에는 삼공신비(三功臣碑)가 세워져 있다. |
현판 |
태사묘(太師廟) |
삼태사를 모시는 사당의 당호이다. |
숭보당(崇報堂) |
태사묘의 강당 건물의 당호이다. |
경모루(景慕樓) |
태사묘의 정문에 해당되는 누문으로 튼튼하고 묵직하게 써진 해서체이다. |
안묘당(安廟堂) |
임진왜란 때 삼태사의 위패를 안전하게 모신 순흥안씨 안금이를 모신 사당의 당호이다. |
삼공신묘중수기(三公臣廟重修記) |
숭보당 안에는 이황(李滉)이 지은 중건기문이 편액으로 걸려 있다. |
태사묘중건기(太師廟重建記) |
권상규(權相圭)가 지은 중건 과정을 걸어 놓았다. |
삼공신비(三功臣碑) |
묘정에는 삼공신비(三功臣碑)가 세워져 있다. |
관련인물 | |
- 김선평(金宣平, 901~?) | |
고창군 성주(城主)로 930년(태조 13) 태조를 도와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고창군에서 대파하는 데 공을 세워 대광(大匡)이 되고, 이에 고창군은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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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행(權幸, 미상) | |
본성(本姓) 김(金)씨. 본래 신라에 속하였고, 뒤에 후백제(後百濟)의 지배하에 있던 고창(古昌:安東)의 수령(守令)으로 있다가 견훤(甄萱)이 신라 경애왕(敬哀王)을 자살하게 한 데 대해 분개하던 중 930년(고려 태조 13) 고려가 고창에서 후백제군을 무찌르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이에 태조로부터 권씨(權氏)의 성(姓)을 하사받고,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의 계(階)를 받았다. 그리고 아부공신(亞父功臣)에 책록되고, 동궁(東宮)의 스승인 정1품 태사(太師)의 벼슬에 올랐다.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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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정필(張貞弼, 898~978) | |
호는 포음(圃陰)으로 처음 이름은 길(吉)이었다. 888년(신라 진성왕 2) 중국 절강성(浙江省)에서 태어났다. 경순왕 4년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이 고창의 병산 (甁山:지금의 안동 가수천)에서 부딪칠 때 권행, 김선평과 함께 왕건을 도와 크게 이겼다. 이 싸움에서 견훤의 군사는 8천 여 명이나 죽었다. 장정필은 그 뒤 인동(仁同)에 물러가 강학 하다가 만년에 안동으로 옮겨 경종 3년에 죽으니 향년 91세였다. 안동부(安東府)의 백성들이 그 공덕을 추모하여 사당을 세워 ‘삼태사(三太師)’를 함께 제사한다. 930년 태조가 안동에서 견훤(甄萱)을 토벌할 때 세운 공로로, 권행과 장정필은 대상(大相)이란 벼슬을, 김선평은 대광(大匡)이란 벼슬을 받았다 |
행정기관 이야기 |
고지도에 따르면 태사묘는 옛 안동대도호부의 객사 위쪽에 자리하고, 현재 안동시의 중심부인 북문동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의 개국 공신인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 삼태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원래 고려시대 983년(성종 2년)에 부사(府司) 내에 삼공신묘를 창건하였고, 삼공신위판(三功臣位版)은 부사에서 객사로 옮겨 모셨다. 1481년(성종 12)에 관찰사 김자행(金自行)이 목면과 베를 내놓으면서부터 묘우(사당)를 세우는 터전을 마련했다. 이어서 1540년(중종 35) 안동부사 김광철(金光轍)이 현재 위치에 묘를 건립하였으며, 경상도 관찰사 권철(權轍)이 제사지낼 수 있는 논밭과 노비를 주었다. 당시 정월, 단오,추석, 동지의 네 절기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1556년 안동부사로 부임한 권소(權紹)는 논밭과 곡물을 더해주고 권씨 성을 가진 수석 호장(戶長)에게 맡겨 수확을 취하여 매년 제사를 받들게 하는 등 제도화에 힘을 쏟았다. 1585년 당시 도유사(道有司) 송암 권호문의 주창으로 봄가을에 향사(享祀)키로 결정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1613년 7월에 경상감사 권반 경주부윤 권태일이 구묘(舊廟)를 증축하고, 삼공신묘를 태사묘로 개칭하고 태사묘 현판은 권복흥이 썼다. 1721년 3월 16일 안동서문에서 일어난 대화재 때에는 부사(府司)도 탔으나 묘우만은 보전되어 있었다. 그 후 삼태사의 후손과 덕망 있는 자들이 논의하여 중건공사를 일으켜 1년 만에 옛 모습으로 완공하였다. 1950년 6·25 전란 때는 묘역이 폭격으로 소실되었으나 후손들의 노력으로 13년에 걸쳐 1963년에 복원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폭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별유사(別有司) 장봉섭이 삼태사 위판을 성곡동 장씨 광풍정(光風亭)에 옮겨 놓았다가 다음해 8월 13일에 능동 안동권씨 재사 보판각으로 옮기고 매년 춘추 향례를 봉행하였다. 그렇게 진행하여 오다가 1953년에 3성씨의 후손이 중건 위원회를 발족하여 후손들의 성금으로 새로 태사묘를 중건하니 묘우(祠堂), 숭보당(崇報堂), 전사청(典祀廳), 동서재(東西齋), 안묘당(安廟堂), 주사(廚舍)의 공사(工事)를 마치고 1958년 9월에 삼태사공 위판을 다시 원래 위치로 되돌려 놓았다. 그 후 1963년에 보물각(寶物閣), 경모루(景慕樓)도 이어 준공하였다. 중건 후 수 십여 년 간 퇴락으로 3성씨의 후손들이 걱정하여 오던 중 도유사(道有司) 김중한이 주관하여 묘우 및 경내 건물의 보수를 태사묘관리위원들과 협의하여 관계기관과 절충한 결과 국가 보조금으로 1993년부터 3년에 걸쳐 묘우를 비롯하여 경내 건물과 담장을 깨끗이 일신하였다 |
관련유물 | |
- 보물각 소장유물 | |
보물각에는 붉은 잔, 비단, 관, 가죽신, 부채 등 1967년 6월 23일에 보물 제451호로 지정된 삼태사의 유물 22점이 보존되어 있다. 중요한 것들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칠탁잔(朱漆托盞:붉은 잔), 옥관자(玉管子), 혁대(革帶), 관(冠), 동인(銅印), 포선(布扇:부채), 고견포(古絹布:비단), 은시저(銀匙箸), 가죽신(革靴), 복주목사정광도교지(福州牧師鄭光道敎旨), 고려공민왕 친필(恭愍王 親筆).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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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민왕 친필 | |
공민왕의 유물이라고 하는 공민왕 친필은 국내에서 유일한 작품이다. 그리고 옥관자도 역시 공민왕이 쓰던 유품이라고 전한다. |
관련 이야기 | |
- 안묘당(安廟堂) | |
임진왜란 때 묘직(墓直)인 안금이(安金伊)가 후손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왜란 당시 그는 삼태사 위판을 길안면 국란 계곡 깊은 동굴에 모시고 3년이나 봉안(奉安)하다가 난리가 평정되고 나서 되돌려 놓으니 나라에서 그 뜻이 갸륵하다 하여 다음과 같이 물었다. “공이 크니, 벼슬을 요구하던지, 하고 싶은 대로하여라.” 그러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 나는 벼슬을 요구할 수도, 벼슬할 자격도 못 됩니다. 이 어른들에게 제사를 바친 뒤에, 그것을 물려서 나한데 갖다 놓고 제사를 지내주면 그걸로 나는 만족합니다.” 그래서 그 후에 제사를 물리면 안금이 제사를 반드시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첨지(僉知)의 벼슬을 내리고 경내 일각에 안묘당(安廟堂)을 세우고 봉안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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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례 | |
983년(고려 성종 2)에 처음으로 3명의 제사를 안동부사가 거행하였다고 한다. 1540년(중종 35) 안동부사 김광철(金光轍)이 현재 위치에 묘를 건립하고 정월, 단오, 추석, 동지의 네 절기에 제사를 지냈다. 1585년 당시 도유사(道有司) 송암 권호문의 주창으로 봄가을에 향사(享祀)하기로 결정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현재는 춘추중월중정일(春秋仲月中丁日)에 향사(享祀)하는 사당(祠堂)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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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찰사의 태사묘 관리 | |
경상도 관찰사 권철(權轍)이 태사묘의 경제를 담당할 논밭을 주었다. 1556년 안동부사로 부임한 권소(權紹)는 권씨 성을 가진 수석 호장(戶長)에게 관리를 맡겨 매년 제사를 받들게 하는 등 제도화에 힘썼다. |
안동 > 시내권 > 북문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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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의 잦은 왕래로 장이 열린 북쪽 지역의 마을 | |
북문동은 안동부성의 북문이 있었던 곳이다. 북문과 안팎으로 이어진 거리를 북문거리 또는 북문통이라 하였다. 이 북문거리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었으므로 상시적 시장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 계속되어 장날이 되면 안동 북쪽 지역의 시장은 북문거리에 선다. 북문동은 일제 때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율세동(栗世洞)의 일부를 잘라서 이곳에 있는 태사묘(太師廟)의 이름을 따서 태사정(太師町)이라 하다가, 1947년 일본식(日本式) 동명을 변경할 때 다시 북문동으로 고쳤다. 현재 북문동 안동의료원 앞에는 고려 건국의 큰 공을 세워 성을 하사 받고 태사가 된 삼태사의 묘당(廟堂)이 있다. 북문의 안쪽, 즉 북문안 혹은 북문내리(北門內里)에는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주로 상점을 경영하며 생활하였다. 이 북문거리의 동남쪽, 즉 삼태사묘의 앞쪽(현재의 조흥은행이 있는 곳)에는 객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북문에 인접한, 지금의 안동시청 자리에는 안동의 향교가 있었다. 물론 안동의 향교자리는 명륜동으로 되어 있지만 향교에 내왕하는 안동부성의 성문은 언제나 이 북문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북문 바로 앞에는 안막동 골짜기 물이 흘러내리는 개천이 있어 자연히 북문 밖을 해자처럼 에워싸고 흘러내려 영호루(본래의 위치는 낙동강 철교가 지나가는 안동읍성 쪽 강 안에 있었음) 앞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들었다. 지금은 북문을 감싸고 흘러내리는 개천이 복개가 되어 안동시청 앞 도로가 되었다. 북문이 있었던 북문삼거리 도로 한가운데에는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 안동향교의 서쪽에 있는 잠두산(현재의 목성동 성당자리)에는 사직단이 있었다. 안동부성의 경계선은 향교를 밖으로 하여 북문을 내고 안막동에서 흐르는 개천을 부성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다시 사직단이 있던 잠두산 위쪽으로 부성을 쌓아올려 산성처럼 만들었다. 그러므로 북문은 안막동 골짜기를 따라 양쪽이 막힌 외길로 난 문이었고 이러한 지형으로 북문동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긴 하지만 상주 인구가 많지는 않았다. |
출처 : | 水 山 | 글쓴이 : 군계일학 원글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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