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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권씨문중

안동권씨 문경공 권진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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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지 :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삼성리 산 42

인물 문경공(文景公) 권진(權軫)

본관은 안동. 호는 독수와(獨樹窩). 아버지는 감찰규정(監察糾正) 희정(希正)이다. 1377년(우왕 3)에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권세가인 염흥방(廉興邦)의 조카딸과 결혼하라는 제의를 거절하여 여러 해 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몇 해 뒤 의창현(義昌縣)의 현령이 되어 연해안지방에 출몰하던 왜구를 격퇴하는 한편, 폐단을 제거하고 빈민을 구제했다. 이 일로 당시 시중이었던 이성계(李成桂)의 천거로 전주판관이 되었다. 1398년(태조 7) 조전원수(助戰元帥) 성석린(成石璘)이 평안도로 출진할 때, 그의 추천으로 경력(經歷)이 되었다. 1401년(태종 1) 지형조사(知刑曹事)에 이어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지내고, 1406년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했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다. 그뒤에 형조·호조·이조판서를 지냈고, 1426년(세종 8) 찬성(贊成)이 되었으며, 1431년 우의정에 올랐다. 1433년 이조판서를 겸하고 있을 때 사람을 잘못 천거하여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 한남정맥에서 분지(分枝)된 일맥(一脈)이 문형상, 고불산, 성남의 남한산을 기봉(起峰)하면서 당당자행(堂堂自行) 행룡(行龍)함에 있어 분지벽맥(分枝劈脈)한 방개수족(放開手足)이 원원회포(遠遠廻抱)하여 진출하는 주룡(主龍)의 좌우에서 긴밀(緊密)하게 협보(挾輔), 동분서치(東奔西馳)하던 용맥(龍脈)이 남한산에서 태방(兌方)으로 재차(再次) 분지낙맥(分枝落脈)하여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에서 질단과협(跌斷過峽)을 형성하고, 점점돈기(漸漸頓起)하여 주산(主山)인 용마산을 기봉(起峰)한 후 손방(巽方)으로 낙맥(落脈)한 일조맥(一條脈)의 용진처(龍盡處)에 광주시 남종면 삼성리가 있다. 이 삼성리는 흔히 『삼정골』이라고도 부르는데, 문경공 권진, 교양부원군 노물재. 함길도관찰사 안망지, 이렇게 세 정승(政丞)의 묘(墓)가 이 마을에 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현무봉(玄武峰)에서 개장천심(開帳穿心)한 중출맥(中出脈)이 진처(盡處)에 이르러 후부(厚富)한 당판(堂版)과 전순(氈脣), 좌우선익(左右蟬翼) 등 혈증(穴證) 확실하여 결지여부(結地與否)는 의심할 바가 없다 다만 점혈(點穴)함에 있어 다소 하처(下處)에 묘지를 조성한 것으로 보이며, 개장(開帳)한 좌변각(左邊脚)은 묘지를 중심으로 좌선(左旋)하면서 회포(廻抱)하여 다정(多情)한 좌청룡(左靑龍)을 형성하였고, 개장(開帳)한 우변각(右邊脚)은 우선(右旋)하는 듯하여 묘지를 감싸는 듯 하지만 견실하지 못하다 다만 주산(主山)인 용마산에서 분지(分枝)한 일맥(一脈)이 우선(右旋)하면서 회포(廻抱)하여 우백호(右白虎)의 역할을 충족해주면서 혈전(穴前)에 이르러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을 형성하면서 좌우용호사(左右龍虎砂)가 상교(相交)하여 우수도좌(右水到左)하는 1차수(一次水)의 지호(地戶)를 교쇄직결(交鎖織結)함으로써 불통주(不通舟) 형세를 이뤄 소수(消水)함이 불견(不見)이다.

▼ 입수처(入首處)

 

▼ 정혈처(正穴處)에서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을 조망(眺望)해보니 무갑산이 한눈에 들어온다.